잡담/추리 게임 특집

추리 게임은 정말로 '추리를 하는' 게임일까? -1 (Feat. 역전재판)

충혈 개구리 2025. 1. 15. 04:12

*이 글에는 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대역전재판 1&2의 핵심적이지는 않으나, 일부 내용과 게임의 구조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추리게임으로서 가장 유명한 게임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단언컨데 역전재판이 제일 먼저 거론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게임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익히 알고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어서 법정에서 검사와 싸우며 재판에서 피고인의 무죄를 받아낸다는 내용의 게임 시리즈다.

물론, 추리 게임이기에 이 작품은 변호사 시뮬레이터가 아니다.

실제로는 변호사가 현장을 조사하며 탐정 역할을 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법정에선 재판을 빙자한 검사와 증인과의 논리배틀을 벌이면서 진범을 밝혀내는 형식의 게임이다.

그런 실질적으로는 추리 소설 같아 보이는 이야기를 '재판'의 형식으로, 또 '변호사'라는 입장에서 '검사'와 싸우면서 헤쳐나간다는 것이 다른 작품과의 차별점이다.

그 재판에서 언제나 위기의 순간 '역전'하며 이긴다는 것이 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역전재판의 각 편의 첫 에피소드에는 뭐랄까, '국룰'이 있다.

물론, 탐정 파트 없이 튜토리얼을 겸하는 법정 파트만 있다는 점을 말하는 거다.

게임적으로는 이 게임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를 자연스럽게 학습시키면서 이 게임이 제공하는 재미, 역전의 쾌감을 지루한 부분 없이 곧바로 잘 느끼게 하는 훌륭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추리로서 바라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게임이 바로 시작되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정보, 중요한 증거와 증언이 모두 재판을 진행하면서 제공되므로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진상을 밝혀내기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는 단지 튜토리얼 격인 각 편의 에피소드 1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대역전재판 같은 경우는 아예 탐정파트를 극단적으로 짧게 만들고 최소한의 증거만을 제공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의 전체 흐름을 아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역전재판에서도 많은 증거가 수사중에 드러나 사건의 전체 내용을 어느정도 머릿 속에 그릴 수 있는 편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핵심 증거와 증언은 법정에서 재판 중에 쏟아져나온다.

 

이상하지 않은가? 추리 게임인데, 추리물의 하이라이트인 사건을 정리하고 밝혀내는 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사건에 대해 작품의 감상자가 '추리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니?

이는 생각을 좀 뒤집으면 해결되는데, 사실 역전재판의 '재판'파트는 이른바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탐정의 진상규명', 정답을 알려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전재판의 재판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진상에 도달하기 위한 추리를 하게 하는 파트'다.

굳이 게임의 '추리를 하게 만드는 부분'에 들어가기 전 부터 추리를 할 필요는 없게 만들어져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 부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증언을 듣지못하고, 증거가 부족하니 아예 추리가 불가능한 부분까지 있고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 '역전'재판인 만큼, 이 재판 파트의 실질적인 구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변호사 측의 역전과 검사 측의 역전이 번갈아가며 일어나 최종적으로는 플레이어가 몰입하는 쪽인 변호사 측인 역전을 성공해 무죄를 받아내는 쾌감을 극대화하는 형태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을 하기 전에 사건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제공되는지 제공되지 않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플레이어가 자신이 생각해서 사건을 밝혀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이끌어낸 역전에서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대역전재판 같은 경우 기존 역전재판에 비해 수사파트가 단순화, 선형적 구조로 되어있음에 비해 재판파트는 매우 길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게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부분이, 역전재판은 재판이 중단되고 다음날로 연기되면서 그 사이에 추가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 매우 흔한데, 대역전재판은 1편 전체를 통틀어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뭔가 이 상황에서 역전재판은 하루 넘어가고 다음날에 계속하지 않았나? 싶은 전개에서도 그냥 쿨하게 1시간 휴정하고 재판이 계속된다.

뭔가 추가로 증인을 불러야 할 것 같은 전개는 애초에 방청객 중에 그 사람이 있었다던가, 배심원 중에 있었다를 시전한다.

 

이건 이 작품이 그냥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기존 역전재판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끔가다 보면 역전재판에 대해 '서순이 불합리하다.'는 얘기가 보이는데, 재판중 플레이어는 이미 답을 깨닫고 있는 것을 게임은 정해진 순서대로 풀어나가야하므로 답답해하는 불만과, 수사중 지금 증거 다 찾은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뭘 더 해야 게임이 진행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다.

 

대역전재판은 이 두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안으로 '수사파트를 단순화하고 재판파트를 늘린다.'를 제시한 것이다.

수사파트가 직관적이고 단순해지면 헤맬 일 없이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고, 증거와 증언이라는 정보를 죄다 재판파트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풀어버리면 플레이어는 지금 진행되는 부분의 다음을 모르니까 애초에 답답해할 일이 없는거다.

 

물론 이 구조는 '추리'로서 생각하면 '애초에 추리가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말도 안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게임으로서는 플레이어의 몰입도를 높이고 개발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데에 뛰어난 선택이란 말이다.

추리로서는 파탄인 구조가, 게임으로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추리 게임을 하면서도 진짜 추리를 할 수 있다면...
추리 소설 읽기 따위 때려치고 만다!

 

추리게임은 게임이라는 구조상, 추리 소설처럼 문제를 제시한 뒤에 정답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으로 플레이어를 인도하고자 하는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으로서는, 플레이어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그러고 있다고 착각하는 레일에 태우는게 좋고, 애초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경험, 탐정, 변호사가 된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지 플레이어가 진짜 탐정처럼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추리'를 하는 것까지는 요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 다른 추리 게임도 이런 식으로 사전에 추리가 불가능한 구조를 취할까?

아니면, 뭔가 다른 시도를 한 게임은 없을까?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나가겠다.